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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당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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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혁명당은 1929년 만주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민족유일당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 세력 통합 논의가 진행되면서, 혁신의회 세력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조선혁명당은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유지하며 한인 사회의 자치 활동과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했으며, 자치 기구인 국민부와 무장 조직인 조선혁명군을 이끌었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주국' 수립으로 활동이 쇠퇴하였고, 1935년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며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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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당 (1929년)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의 국기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의 국기
정당 명칭조선혁명당
로마자 표기Joseon Hyeongmyeongdang
한자 표기朝鮮革命黨
창당1929년
해산1935년
후신조선민족혁명당
지도자현익철
이념사회주의
좌익 민족주의
한국 민족주의
정치 성향중도좌파 ~ 좌익
슬로건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의 절대적인 독립을 쟁취하자.
무장 단체조선혁명군

2. 결성 배경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의 영향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 또한 통합 논의를 시작했다.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 기구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던 삼부(三部)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삼부 내부의 갈등과 통합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회의는 무산되었다. 이에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 주류파, 정의부 탈당파는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1928년 12월 혁신의회를 조직했다. 이에 대응하여 정의부 다수파, 신민부 민중파, 참의부 잔존파는 1929년 4월 국민부를 결성했다.[1]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단일 대오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면서, 통합 노력은 '의회파'와 '추성회'파 간의 대립에 직면했고, 양측은 모두 '의회파'의 민중의회에 반대했으며, '조선혁명당'파의 혁신의회로 결성되었다. 이후 민중의회는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유지하며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 1929년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여 한인 사회에서 자치 활동과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자치 기구인 민중의회와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이끌며 1929년 만주에서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한 독립 운동 단체이다.[1]

2. 1. 민족유일당운동과 만주 독립운동 세력 통합 논의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의 영향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 또한 통합 논의를 시작했다.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 기구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던 삼부(三部)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삼부 내부의 갈등과 통합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회의는 무산되었다. 이에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 주류파, 정의부 탈당파는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1928년 12월 혁신의회를 조직했다. 이에 대응하여 정의부 다수파, 신민부 민중파, 참의부 잔존파는 1929년 4월 국민부를 결성했다.[1]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단일 대오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면서, 통합 노력은 '의회파'와 '추성회'파 간의 대립에 직면했고, 양측은 모두 '의회파'의 민중의회에 반대했으며, '조선혁명당'파의 혁신의회로 결성되었다. 이후 민중의회는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유지하며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 1929년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여 한인 사회에서 자치 활동과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자치 기구인 민중의회와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이끌며 1929년 만주에서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한 독립 운동 단체이다.[1]

2. 2. 혁신의회와 국민부의 대립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의 영향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 기구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던 삼부(三部)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삼부 내부의 갈등과 통합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회의는 무산되었다. 이에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 주류파, 정의부 탈당파는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1928년 12월 혁신의회를 조직했다. 이에 대응하여 정의부 다수파, 신민부 민중파, 참의부 잔존파는 1929년 4월 국민부를 결성했다.[1]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단일 대오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면서, 통합 노력은 '의회파'와 '추성회'파 간의 대립에 직면했고, 양측은 모두 '의회파'의 민중의회에 반대했으며, '조선혁명당'파의 혁신의회로 결성되었다. 이후 민중의회는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유지하며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 1929년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여 한인 사회에서 자치 활동과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자치 기구인 민중의회와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이끌며 1929년 만주에서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한 독립 운동 단체이다.[1]

3. 조선혁명당의 결성

1928년부터 1929년 사이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을 단일대오로 통합하려는 운동이 전개되면서 통합의 노력이 '협의회'파와 '촉성회'파로 대립되었고, 양 진영은 '협의회'파의 국민부와 '촉성회'파의 혁신의회로 정립되었다.[7][8][9][10]

국민부는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유지하면서 한인사회의 자치활동과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오다가 1929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개편하여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이미 당으로서의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혁명당이 조직되기 이전에도 당의 활동이 나타나고 있다. 그해 12월에 조선혁명당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위임받아 국민부의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을 조선혁명당 예하에 편성하였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으로서 조선혁명당의 영도 아래 국민부가 민정을 담당하고 조선혁명군이 군사활동을 맡는, 당.정.군 삼위일체로 완성된 체제를 구현하였다. 1929년 9월 20일, 제1차 민족부 중앙위원회가 개최되어 조선혁명당 조직이 결정되었다.[1][2][3] 조선혁명당은 1929년 9월 지린성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대한의 절대적인 독립을 쟁취한다"는 기치 아래, 국민부와 정치적 성격을 공유하는 자매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따라서 조선혁명당은 국민부의 독립운동 관련 사항을 담당하고, 조선혁명군 산하에 무장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以黨工作·以黨統治(이당공작·이당통치)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것이었다. 국민부는 한국인 사회의 자치 행정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조선혁명군은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분담했으며, 조직과 운영 방식이 독특했다. 이는 정치 정당인 조선혁명당의 정치적 지도 하에 놓이도록 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4. 이념 및 활동

4. 1. 이념

조선혁명당은 민족주의자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창당 당시 발표된 선언문에는 사회주의적 주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2]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모든 내부 압제와 착취 세력을 파괴하며,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고, 노동자와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함과 동시에 대기업과 기관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대규모 토지 소유를 몰수한다.”라고 하면서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모든 노력을 통해 그들의 삶의 균형 잡힌 발전을 촉진한다.”라고 그 목적을 밝혔다.[2]

이처럼 민족주의자들의 연합임에도 불구하고 선언문에 사회주의적 논리가 주를 이루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민족 운동 내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 대다수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를 수용하는 것이 선전 면에서 더 유리했을 것으로 보인다.[2] 그러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간의 갈등은 극심했고, 결국 민족주의 세력의 현익철이 연하석의 사회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4]

4. 2. 주요 활동

조선혁명당은 1930년대 초 만주에서 한국독립당(만주)과 함께 당 활동을 펼쳤다. 다른 정당들과 달리, 조선혁명당은 항일 투쟁 활동의 정치적 지도를 위한 당 조직 유지에 중점을 두었다.[2]

민족유일당조직연합이 이미 정당으로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혁명당이 조직되기 전부터 당의 활동이 나타났다.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은 민족유일당조직연합으로부터 독립운동과 관련된 모든 사무를 위임받아, 인민위원회의 무장 조직인 조선혁명군을 조선혁명당의 지도 하에 조직했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유일의 정당으로서, 민정 행정을 담당하는 국민부와 군사 활동을 담당하는 조선혁명군을 통해 당, 정부, 군의 삼위일체를 갖춘 체제를 실현했다.[2]

조선혁명당은 두 개의 정당이 국가를 통치한다는 원칙에 따라 혁명 활동을 담당했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의 한인 사회를 관리하는 자치 기구인 국민부와 군사 조직인 조선혁명군을 이끌었다. 현익철이 조선혁명당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혁명당은 독립운동의 이론과 정치적 사상을 남만주의 한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잡지와 간행물을 발행했다. 또한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활동을 장려했다.[2]

5. 조직

조선혁명당은 중앙위원 2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7부 3위원회를 두었다. 군사위원회 산하에는 조선혁명군을 두었다.[1][3]

조선혁명당 중앙당부의 주요 구성은 다음과 같다.[1][3]


  • 중앙집행위원장 현정경(향)
  • 비서부위원장 현정경(겸)
  • 조직부장 고할신
  • 교양부장 김보안
  • 경제부장 장승언
  • 국제부장 최동오
  • 민중부장 고이허
  • 군사위원회위원장 이웅
  • 자치위원회위원장 현익철
  • 선전위원회위원장 장철


창당 당시 현익철(중앙집행 비서), 현정경(정치), 이웅(군사), 고이허(조직), 최동오(외교), 장승언(재무), 김보안(교육), 고할신(선전) 등이 간부로 활동했다.[1][3] 도 및 군 당 부서를 포함하여 100개의 지부 및 부서에 3,500명의 준당원과 2,000명의 당원이 있었다.[1][3]

조선혁명당의 초기 중앙위원은 다음과 같다.[1][3]

현익철, 조선혁명당 중앙위원장 겸 조선혁명군

5. 1. 중앙 조직

조선혁명당은 중앙위원 2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7부 3위원회를 두었다. 군사위원회 산하에는 조선혁명군을 두었다.[1][3]

조선혁명당 중앙당부의 주요 구성은 다음과 같다.[1][3]

  • 중앙집행위원장 현정경(향)
  • 비서부위원장 현정경(겸)
  • 조직부장 고할신
  • 교양부장 김보안
  • 경제부장 장승언
  • 국제부장 최동오
  • 민중부장 고이허
  • 군사위원회위원장 이웅
  • 자치위원회위원장 현익철
  • 선전위원회위원장 장철


창당 당시 현익철(중앙집행 비서), 현정경(정치), 이웅(군사), 고이허(조직), 최동오(외교), 장승언(재무), 김보안(교육), 고할신(선전) 등이 간부로 활동했다.[1][3] 도 및 군 당 부서를 포함하여 100개의 지부 및 부서에 3,500명의 준당원과 2,000명의 당원이 있었다.[1][3]

조선혁명당의 초기 중앙위원은 다음과 같다.[1][3]

5. 2. 주요 인물

조선혁명당의 초기 중앙위원은 이탁, 최동오, 현익철, 유동열, 이일세, 고할신, 김이대, 이웅, 이동산, 현정경, 이동림, 김돈, 김탁, 고이허, 이진탁, 문시영, 김안보, 김진호, 안홍, 강제하, 장승언, 장세용, 김석하 등 23명이었다.[1][3]

조선혁명당은 7부, 3위원회를 두었으며, 군사위원회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중앙당부 주요 구성은 다음과 같다.[1][3]

  • 중앙집행위원장 현정경
  • 비서부위원장 현정경(겸)
  • 조직부장 고할신
  • 교양부장 김보안
  • 경제부장 장승언
  • 국제부장 최동오
  • 민중부장 고이허
  • 군사위원회위원장 이웅
  • 자치위원회위원장 현익철
  • 선전위원회위원장 장철


창당 당시 현익철(중앙집행 비서), 현정경(정치), 이웅(군사), 고이허(조직), 최동오(외교), 장승언(재무), 김보안(교육), 고할신(선전) 등이 간부로 활동했다.[1][3] 도 및 군 당 부서를 포함하여 100개의 지부 및 부서에 3,500명의 준당원과 2,000명의 당원이 있었다.[1][3]

6.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과의 관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인 현익철이 조선혁명당의 자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조직상 분리되면서도 인맥이 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12][13]

결국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의 관계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입각한 유일당과 행정부의 관계였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일당으로서, 국민부는 동포사회의 자치행정기관으로서 그 조직과 운영이 조선혁명당의 영도 아래에 놓였다.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처음에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독립군이었다. 이후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 산하로 이관되었다.

조선혁명군은 그 조직과 운영이 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에 놓여, 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는 당군으로 활동하는 체제였다.

6. 1. 국민부와의 관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인 현익철이 조선혁명당의 자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조직상 분리되면서도 인맥이 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12][13]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의 관계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입각한 유일당과 행정부의 관계였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일당으로서, 국민부는 동포사회의 자치행정기관으로서 그 조직과 운영이 조선혁명당의 영도 아래에 놓였다.[1][3]

6. 2. 조선혁명군과의 관계

조선혁명군은 처음에는 국민부 산하의 독립군이었다. 이후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 산하로 이관되었다.[1][3]

조선혁명군은 그 조직과 운영이 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에 놓여, 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는 당군으로 활동하는 체제였다.[1][3]

Korean Revolutionary Army 깃발

7. 쇠퇴와 해산

1931년 8월, 일본은 조선혁명당 위원장 현익철을 체포했다.[5] 1932년 1월 신빈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최동오 등 원로파는 만주 활동의 어려움을 이유로 중국으로의 이동을 주장했으나, 이호원, 김보안 등 청년파는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 지속을 주장했다.[5] 그러나 1932년 1월 20일경, 회의 장소가 일본에 습격당해 이호원, 김보원 등 9명이 체포되었고, 2월까지 이어진 탄압으로 약 60명이 체포되고 80명이 순국했다.[5][2] 조선혁명당은 지도부를 개편하여 고이허를 당 중앙 집행 위원장, 김동산을 민족 집행 위원장,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5][2]

1931년 9월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수립으로 조선혁명당의 활동은 쇠퇴했다.[2] 1934년 11월, 군민대표회의에서 내무부와 조선혁명군을 통합하여 조선혁명군 정부가 수립되었다.[2][3] 조선혁명군 정부는 1935~1936년경 국제적인 위기 발생을 예상하고, 1935년 7월 유광호를 서울에 파견하여 인선공작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재건을 시도했다.[2][3]

한편, 최동오와 김학규는 중국으로 이동하여 관내 운동 세력을 집중시키고 만주에서의 투쟁을 지원하려 했다.[6] 이들은 관내 민족운동 정당들이 참여한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다.[6] 1935년 7월 결성된 민족혁명당에서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김학규, 김활석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선혁명당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며 해산을 선언했다.[6][2] 1936년 10월에는 윤영배를 한국에 파견하여 노동자, 농민 조직 결성을 시도했다.[2]

7. 1. 일제의 탄압과 지도부 개편

1931년 8월, 일본은 조선혁명당의 위원장 현익철을 체포했다.[5][2] 1932년 1월 신빈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최동오 등 원로파는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중국으로 이동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호원, 김보안 등 청년파는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그러나 1932년 1월 20일경, 회의 장소가 일본에 의해 습격당하고 이호원, 김보원 등 9명이 체포되었다.[5] 2월까지 이어진 탄압으로 약 60명이 체포되고 80명이 순국했다.[5][2] 조선혁명당은 지도부를 완전히 개편하여 고이허를 당 중앙 집행 위원장, 김동산을 민족 집행 위원장,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5][2]

1931년 9월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수립으로 조선혁명당의 활동은 쇠퇴했다.[2] 만주국 수립 후, 일본은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고 만주 한인 사회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3] 1934년 11월, 군민대표회의에서 내무부와 조선혁명군을 통합, 조선혁명군 정부가 수립되었다.[2] 조선혁명군 정부는 1935~1936년경 국제적 위기 발생을 예상하고 이 시기를 획기적인 재건을 시도할 기회로 삼으려 했다.[2][3] 1935년 7월 유광호를 서울에 파견하여 인선공작위원회를 구성하고 27명의 위원을 한국에 파견했다.[2]

한편, 최동오와 김학규는 중국으로 이동하여 중국 내 운동 세력을 집중시켜 만주에서의 투쟁을 지원하려 했다.[6] 이들은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고, 1935년 7월 결성된 민족혁명당에서 최동오, 김학규, 김활석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6][2] 조선혁명당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고 해산 선언을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해산했다.[2] 1936년 10월 윤영배를 한국에 파견하여 노동자, 농민 조직 결성을 시도했다.[2]

7. 2. 조선혁명군 정부 수립과 민족혁명당 참여

1931년 8월, 일본은 조선혁명당 위원장 현익철을 체포했다.[5] 1932년 1월 신빈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최동오 등 원로파는 만주 활동의 어려움을 이유로 중국으로의 이동을 주장했으나, 이호원, 김보안 등 청년파는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 지속을 주장했다.[5] 그러나 1932년 1월 20일경, 회의 장소가 일본에 습격당해 이호원, 김보원 등 9명이 체포되었고, 2월까지 이어진 탄압으로 약 60명이 체포되고 80명이 순국했다.[5][2] 조선혁명당은 지도부를 개편하여 고이허를 당 중앙 집행 위원장, 김동산을 민족 집행 위원장,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5][2]

1931년 9월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수립으로 조선혁명당의 활동은 쇠퇴했다.[2] 1934년 11월, 군민대표회의에서 내무부와 조선혁명군을 통합하여 조선혁명군 정부가 수립되었다.[2][3] 조선혁명군 정부는 1935~1936년경 국제적인 위기 발생을 예상하고, 1935년 7월 유광호를 서울에 파견하여 인선공작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재건을 시도했다.[2][3]

한편, 최동오와 김학규는 중국으로 이동하여 관내 운동 세력을 집중시키고 만주에서의 투쟁을 지원하려 했다.[6] 이들은 관내 민족운동 정당들이 참여한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다.[6] 1935년 7월 결성된 민족혁명당에서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김학규, 김활석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선혁명당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며 해산을 선언했다.[6][2] 1936년 10월에는 윤영배를 한국에 파견하여 노동자, 농민 조직 결성을 시도했다.[2]

참조

[1] 웹사이트 조선혁명당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 웹사이트 (4) 조선혁명당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3] 웹사이트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https://www.doopedia[...] Doopedia
[4] 웹사이트 (4)조선혁명당]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5] 웹사이트 조선 혁명당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6] 서적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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